“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해냈지만 자신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가끔 일어나는 것을 뉴스를 통해 듣게 됩니다. 남을 살리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불행한 일을 보는 것은 그것 자체로 슬픔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자리에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죄인을 살리는 일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음의 때가 오자 그것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시는 모습은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죽음을 맞이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데, 그 과정에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않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모습 또한 인상적입니다. 여기서 ‘잃는다’는 것은 육체의 생명이 끊어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잃지 않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은 군인들에게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는 것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자기 제자들을 체포하거나 위협하지 말고 이 자리를 떠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하셨습니다. 물론 군인들이 이것을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예수만을 체포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제자들을 놓아주게 됩니다.
예수님의 노력과는 별개로 제자들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란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붙잡혀 로마 감옥에 갇힐 것이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놓아줄 것을 군인들에게 당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9절에 나오는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설명을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은 잘 몰랐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가서 예수님이 자신들을 놓아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의미 보다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보호하신다는 생각만을 했을 것입니다. 군인들이 찾는 사람이 예수 자신임을 스스로 밝히시면서 자신의 제자들은 놓아주라고 하셨으니 제자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잊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 한 사람도 잃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각오가 보호할 능력이 없는 가운데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님을 그들은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요17:12)란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가장 위급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보호를 받았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호를 받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보호를 받는 가운데 웅크리고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주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던지는 신앙인의 모습이 제자들의 삶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는 과잉 보호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보호는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보호를 받을 때에는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다가 주를 위해 목숨도 던져야 하는 상황이 오면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강인한 신앙을 갖도록 이끌어줍니다. 주의 보호는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보호받는 즐거움을 누리는 일은 너무 행복한 경험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성장하면서 보호하시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 삶을 보여준 이들이 교회사를 보면 차고도 넘칩니다. 주의 보호하심은 이렇듯이 우리를 강인하게 만들어줍니다. 지금 보호받고 있다면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즐거움이 우리로 주를 위해 살도록 영적인 힘을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