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장 38절-40절 “아무 죄를 찾지 못했음에도” 2021년 11월 5일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행악자로 고발당한 상태에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은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왕으로 태어났음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도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와의 차별성을 강조하시면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들을 것’이란 말을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것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심문을 끝내버립니다.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빌라도는 그에게 죄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점을 그는 유대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립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행악자로 고발했고 사형에 처해질 것을 요구한 상황에서 빌라도가 이런 선언을 했으니 그들이 반발할 것은 예상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던 빌라도는 노련한 정치인답게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는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유대인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떠넘기는 고도의 정치술을 발휘한 것입니다.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공식 선언을 해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예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죄가 없음을 확신했다면 그냥 놓아주면 될 일인데, 예수를 사형에 처해달라고 고발한 이들에게 ‘그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기에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예수가 아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죄가 없는 예수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책임도 회피하고 집단적 반발도 진정시키는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책략을 발휘했지만 진리에 대한 감각은 없었고 무고한 자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었으니 진리가 바르게 세워질 수가 없었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해집니다. 이런 사악한 권력자에게 심문을 받은 예수님의 처지 또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죄를 찾을 수가 없는 예수를 사형에 처하게 하고 강도죄로 감옥살이를 한 바라바를 놓아주게 했으니 그들의 사악함 또한 너무도 컸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죄가 없는 예수님 주변에는 온통 다 죄인들 뿐인 것을 보게 됩니다. 죄인들이 모여서 무고한 의인을 죽음에 내몰고 있는 형국입니다. 죄인들이 의인을 사형에 처하려는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음에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잔인함이 죄의 진짜 모습임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교회는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미워하는 줄을 알라”(요15:18)는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반드시 기억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어떤 죄도 찾을 수가 없었던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한 세상의 모습을 교회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점 또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강도였던 바라바가 예수님으로 인해 풀려난 것이 이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 때문에 죄로부터 풀려날 수가 있습니다.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죽음으로 세상은 살 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고한 자로 억울하게 죽게 된 것에 대한 분노를 교회가 느낄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