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장 28절 “헛된 경건을 피하려면” 2021년 10월 29일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고 난 후 예수님은 빌라도 관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로마 황제가 심어놓은 유대 통치자인 빌라도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유화 정책을 쓰고 있었던 그는 가급적 유대 종교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유대 사회를 통치했기에 유대인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 관정에 들어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유월절 같은 명절에는 더욱 더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는 행위가 자신을 더럽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 점을 부각시키는데,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에 세우려 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경건을 지키고자 그 곳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갖는 역사적, 신앙적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 매년 그들은 최선을 다해 이 명절을 지켰습니다. 타국에 살던 이들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올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들의 열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열정으로 유월절을 지키려 한 그들의 모습은 당시 사회에서는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그들의 경건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가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로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시기 위해 지금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전에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 했는데, ‘어린 양’이란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위해 쓰이던 제물 개념입니다. 유월절에 제물로 ‘어린 양’을 바쳤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죽음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분을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법정에 고발했고 자신들은 유월절을 경건하게 지키고자 그 법정 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버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경건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유월절을 지키려 했던 그들이 정작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배척했던 것입니다. 과연 이들의 경건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자 했던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죽음에 내던지고 있으니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려 한 것을 볼 때에 지금 우리의 경건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고 말했습니다. 이는 당시 신앙인들의 약점을 들춰낸 것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으면서도 경건하고자 했던 모습을 꼬집은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 했지만 힘없고 불쌍한 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신앙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했던 잘못된 경건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처럼 경건하고자 하는 열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 전체에서 어떤 신앙을 가르치셨는지를 골고루 이해하지 않음으로 인해 헛된 경건을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구약 유월절을 지키려 했던 유대인들처럼 특정 구절만을 신봉하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외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경건이 헛되지 않기 위해 항상 성경 전체를 골고루 섭취하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