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란 옛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분에서 맞는 말은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 공감이 가는 격언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식과 부모는 절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인 점은 확실합니다. 자식이 잘나든 못나든 부모는 사랑으로 대합니다. 자녀가 잘 될 경우 부모는 큰 보람을 느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게 됩니다. 물론 부모의 개인적 욕심을 위해 자식을 출세시키려 하는 것은 볼성사나울 수 있지만 자식의 형편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부모의 영예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2:27-28)란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버지의 영예를 지키려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예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히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만 주력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아버지를 향해 표현한 것인데 그의 삶이 얼마나 아버지에게 맞추어져 있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은 그들의 삶의 초점이 무엇에 맞춰져야 하는지를 교정해준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그렇게 살았기에 그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실 수가 있었음을 놓치면 안됩니다. 예수님 자신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삶도 언제나 아버지의 영예를 위해 재조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가장 올바른 방식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불완전하고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셨지만 우리는 그 일을 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이들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하라”(마5:16)고 하신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성품과 인격을 앞세워서 마땅히 해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외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투철한 사명 의식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사명 의식을 고취시켜야 합니다. 약해질 때마다 예수님처럼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도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작은 돌부리에도 쉽게 꺾이는 것을 아심에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는 사명을 부담스럽게만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홀로 이를 감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삼위 하나님의 돌보심이 허락되었습니다. 지금도 성령의 세밀한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명 의식을 더욱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더욱 철저히 우리의 삶을 재조정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영예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