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가 일으킨 기적들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그를 통해 올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그들이 본 기적들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기적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았던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그를 인식하게 된 것 또한 그들이 목격한 경이로운 사건들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영광입니다. 그의 영광이 어떤 식으로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지를 들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기적을 통해 세상을 뒤집어놓을 위대한 전사로 알고 있었기에 그의 영광이 죽음을 통해 드러날 것이란 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기에 그는 죽어서는 안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그들에게 전하셨습니다. 반복적으로 죽을 것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그들은 이로 인해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마음의 근심은 더욱 깊어지고 예수로 인한 소망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듯이 보였습니다. 이런 상태에 놓인 제자들을 매우 잘 아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지를 기도를 통해 전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영광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1:3)라고 한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만이 가졌던 고유한 영광입니다. 하지만 이 영광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인 죽음을 통해 드러나야 했습니다. 세상에서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을 뜻하는데, 예수님은 이 죽음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온 모든 이들이 이 영광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가 죽는 현장을 보게 해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의 죽음이 갖고 있는 영광의 의미를 깨닫게 해달라는 뜻으로 이런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당시 사회가 말하는 영광은 승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적들을 무너뜨린 최고의 전사가 취했던 영광을 상상했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꿈꾸는 영광의 모습은 언제나 이렇듯이 최정상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밑바닥인 죽음의 자리에 서서 영광을 드러내시겠다고 하셨고 그의 영광을 제자들이 보게 해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 그들이 어떻게 이해했을 것인지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영광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세상의 헛된 영광을 꿈꾸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광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함께 있어”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영광이 과연 예수님의 것과 같은 것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우리의 본능에 속하는 영역 까지도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으려면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 일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새로운 영역입니다. 이를 훈련하도록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세상의 허망한 영광과 싸울 수가 있습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는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을 더욱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