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7)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문제는 구원을 받고나서도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믿자마자 세상을 떠나 천국에 입성하면 좋을텐데 계속해서 고달픈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지금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겠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요한복음17:11에서 “내가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란 언급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제자들은 이 곳에 남겨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없는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낼 때와 같이 살 수 있을까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시절과 같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세상이 아닌 예수님에게 속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근거는 예수님 자신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느냐에 대해 예수님 자신이 모델이 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동안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셨고 제자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악과 싸워야 합니다. ‘악에 빠진다’는 것은 마치 늪에 빠지는 것과 같은데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늪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처럼 악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발견되는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이 악에 빠지지 않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이것이 악과 싸우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이 이렇듯이 악과 싸워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고 하셨는데, 이는 아버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그들에게 기도 형식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악과 싸워야 하고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그들만의 힘으로는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가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보전해주셔야 할 정도로 악의 유혹이 강력하다는 점을 시사해 주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싸워야 할 이 세상의 악은 지금도 여전히 강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에 맞서서 싸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 삶 속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달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지금도 돕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히4:16)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무기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하여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