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 11절-12절 “지켜줄 수 있는 능력” 2021년 10월 4일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아이를 잃어버린 채 평생을 고통 속에서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가슴을 치며 후회 속에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지켜주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픔으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란 말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보전하고 지켰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것은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지켜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예수님이 받으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자식’으로 보셨습니다.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예수님은 해석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에 대한 평가를 예수님은 여러 번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를 팔 자가 가룟 유다임을 이미 아셨던 예수님이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13:18)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택한 자들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이에 대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면서 그의 보호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저자 요한은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호 본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그림이 그의 기도에 뭍어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제자들을 보호해달라는 기도를 아버지께 올리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기도를 하시는 이유는 자신이 더 이상 물리적으로 그들과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머물 수가 없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보호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을 보호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아버지께 보호해달라는 기도를 드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이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 곁을 떠나게 되어서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도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지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조금도 줄지 않고 여전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물리적으로 함께 하지 않는다고 보호할 능력까지 잃어버린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아버지의 이름과 성령의 권능으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지키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호하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을 뒤흔들 수 있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도 예수님의 보호를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의 보호하심을 더욱 신뢰하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것이 가장 건강한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