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2:27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면서 내적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란 기도를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면서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셨습니다.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의 심적 고통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는데, 가장 먼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란 간구를 하셨습니다. 자신을 객관화시켜 ‘아들’로 표현하시면서 ‘영화롭게 해 달라’는 요청을 아버지 하나님께 하신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명성을 드높여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달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는 ‘때가 이르렀다’는 말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죽음을 피하지 말고 완수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에는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려는 굳은 의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가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요한복음12:23-24에서 다시 확인할 수가 있는데, 그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하신 후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비유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한 알의 밀이 죽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영화롭게 된다’의 바른 이해입니다. 예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기도를 통해 이것을 다시 한 번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사명 완수에 모든 것을 내던지셨는지를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한시도 잊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그는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곧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아셨기에 더욱 더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다 ‘영화롭게 된다’는 것에서 온전히 하나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렇듯이 아들이지만 목숨까지도 내던지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살겠다고 굳은 의지를 품었다가도 손해를 입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아침 안개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우리의 의지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도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굳은 의지를 갖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 사명은 단순히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목표를 달성해야 할 사안도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으로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은 기도를 통해 불타올라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전적으로 기도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기도를 통해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 주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