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웃을 일이 없다는 탄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울한 일들이 겹쳐서 찾아오면 마음의 기쁨은 사라지게 됩니다.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사건과 사고를 만나게 되면 견딜수 없는 피로감과 함께 괴로운 감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신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신앙에 감정이 포함되기에 우울한 일들로 인해 신앙이 침체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아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물론 그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실제로 죽음에 이를 것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근심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방치하면 신앙적 침체를 겪게 되고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를 잘 아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신앙이 즐거움으로 가득해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제자들의 삶이 풍성해질 것을 내다보신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은 마음의 근심으로 힘들어하지만 머지않아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진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사람을 변화시키는지를 사도행전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웃게 하거나 기쁨을 주는 일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작은 선물을 주는 것으로, 작은 도움을 베푸는 것으로 상대를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란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는 방식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내 기쁨’으로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를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기쁨이 충만해지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기쁨이 그들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그들 속으로 흘러들어가야만 그들의 기쁨이 충만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서 나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들 내면에서 발생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흘러들어가야 그들의 내면이 기쁨으로 채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체험해야 할 기쁨은 철저히 예수님의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제자들에게 이식될 때에 그들은 이 기쁨을 실제로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게서 수분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듯이 가지인 제자들이 맛볼 기쁨 또한 나무이신 예수님에게서 흘러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철저히 의존해야만 기쁨 또한 그들 안에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이 가득한 삶을 원합니다. 웃을 일이 많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바램과는 달리 우리는 우울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이로 인해 신앙은 침체를 겪게 되고 신앙 생활하고자 하는 의욕은 크게 떨어집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서 힌트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쁨에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울한 감정과 거리를 두면서 예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이 지속되면 그의 기쁨이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신선한 물이 기존의 물을 정화시키듯이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해지면서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기쁨이 가득해지면서 신앙적으로 다시 일어서는 일이 우리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