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럿이기에 등산하는 이들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 길이 오직 하나일 때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길을 포기하든가 어떻게든 그 길을 가든가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합니다. 또한 그 길을 가기로 선택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그 길을 가는 동안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됩니다. 진짜 이 길이 맞는가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다는 매우 단호한 주장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처음부터 강력히 외쳤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란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유일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란 말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의 주장이 얼마나 신뢰할만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는 말로 예수님의 유일성을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말이 무겁게 와닿기 위해서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에게 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운지를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오는 것’의 가치를 안다고 해서 예수님의 유일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말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이를 신성모독으로 여겨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을 예수님이 알려주었어도 그들은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었기에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을리가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자들로서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을까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말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이 시점에서 볼 때에 그렇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고 하신 것 또한 제자들이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곧 길과 진리와 생명임을 알게 되면 이제부터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게 됩니다. 아버지를 알고 싶다면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면 됩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아버지에게 이르는 길을 또한 확실히 알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 중 어느 한 쪽만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자신이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아버지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독단적이란 비방을 들어도 이것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방식이기에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