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 36절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2021년 7월 9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갈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분노와 짜증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선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지만 미리 알려주지 않은 불특정 책임자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운일 수 있습니다. 그런 행운조차 허락하지 않는 막다른 골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사람들은 절망을 합니다.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못한채 모든 것을 포기해버립니다. 우리는 이 곳을 바로 죽음이라 부릅니다. 죽음 앞에 선 모든 사람은 마치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지만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곧 예수님만은 예외입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막다른 골목에 있다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길을 찾아서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을 향해 돌진하면서도 조금도 위축되거나 좌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에게 그 길을 가고 있다고 미리 말씀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물론 이 길은 그분만이 가야하는 외로운 여정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요13:33)는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란 질문을 던지면서 그 길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 길이 죽음이 아닌 마치 숨겨둔 보물을 찾으러 가는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동안에 보여주셨던 놀라운 기적들이 이렇게 상상하도록 자극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신 몰래 예수님 혼자서 그 곳에 가실까봐 전전긍긍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곳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이 빠지는 것을 극도로 염려하는 그의 감정 상태를 느낄 수가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길로 걸어가시는데 베드로는 영광의 길로 상상하면서 그 곳에 함께 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그 곳을 알고 싶어서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베드로를 서운하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빼놓고 다른 제자들만 데리고 그 곳에 가시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 가겠다고 결정한 베드로에게 ‘지금은 네가 올 수 없다’고 하니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말은 아마도 그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은 베드로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자신을 보지 못한채 엉뚱한 상상만 하면서 예수님이 가시려는 길을 따라가려 했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를 모르기에 그저 그분과만 함께 하면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이란 기대감만 컸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가시밭길을 절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이 약간의 고생은 있다 해도 화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다’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여기서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하는 복을 누릴 것을 고대한다면 우리는 준비가 덜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죽음의 길을 외면한채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만을 고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가볍게 여기고 다른 것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멍들게 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의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길을 주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가지 난관을 거치겠지만 결국은 주님의 길을 진실되게 따라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