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 23절-26절 “의문을 풀어보려 하지만” 2021년 7월 5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시는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을 때 아무도 그것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판다’는 것은 배신을 뜻하는데, 이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그들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로마인들에게 팔아넘기는 행위인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신의 수위를 매우 낮게 본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제자들 사이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가 나서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고 옆에 있던 다른 제자를 통해 확인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란 본문의 설명에서 추측해볼 수가 있습니다. 예민한 이야기를 해야 했기에 가장 안전한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제자가 물어보면 훨씬 더 답을 얻기가 쉬울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요청을 받은 그 제자는 예수님에게 “주여 누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듣고서 예수님은 배신할 사람을 직접 지목하기보다 하나의 행동을 취하십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은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 주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노골적으로 가룟 유다가 배신자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 사이에 퍼져있던 의문점이 이제는 완전히 풀렸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제자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배신자가 누구인지를 제자들이 확인했지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딱히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배신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그들은 잘 알지 못했기에 확인만 하고서 그냥 넘긴 것입니다. 도대체 왜 확인을 하려고 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확인하고자 했던 내용의 심각성에 비해 제자들의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임을 이 정도로 확실히 알았지만 제자들은 단순한 지적인 호기심에서 물어본 것이기에 답을 알았어도 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가룟 유다의 배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고 그의 자살을 목격하게 되지만 지금 여기서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누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냐에 대한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었지만 제자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큰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무엇을 조심할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달라지는 것이 전혀 없음을 확인만 할 뿐입니다.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알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 앞에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기에 신앙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것들을 들어도 그냥 흘려보내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면서 신앙적인 질문들이 생깁니다. 이것을 꼭 풀어야만 신앙 생활을 잘 할 것 같아 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답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 생활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신앙적 의문을 해결했지만 삶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영적으로 무감각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 구원을 얻느냐란 질문을 던지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답을 얻지만 그것으로 만족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모르는채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이런 실수가 우리에게 참으로 많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신앙을 알게 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는 모습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신앙적 허점이 고스란히 우리 삶에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그를 배신하는 일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신앙적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 모습이 우리 삶에 나타날 때 우리의 신앙은 한 걸음 더 진전을 이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