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님의 죽음은 다각도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그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로마인의 시각에서 보면, 정치적인 적으로 반드시 죽여야 하는 대상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신성 모독을 범한 죄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핵심 제자들 중 하나가 배신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6:70)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13:10)면서 제자들에게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를 아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직접적으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실 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본문은 “심령이 괴로워”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는 배신감에 치를 떠는 모습이 전혀 아닙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의 감정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고통을 솔직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이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것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란 말이 제자들 사이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를 본문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의심하더라’는 말을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동지들인데 그 중의 하나가 스승을 배신할 것이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 사이가 항상 좋았던 것만은 아닙니다. 때론 서로 경쟁하듯이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를 놓고 신경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들 사이가 항상 친밀하고 우호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부족한 모습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스승을 배신할 정도는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적으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를 놓고 모든 이들이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물론 속으로는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궁금하기는 했습니다. 그렇기에 ‘서로 보며’ 눈짓을 주고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팔지는 않을 것이란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이런 자신감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듯이 예수님은 그들 중 하나가 배신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그 배신자가 가룟 유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들 중에 예수님을 배신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로는 설마 우리 가운데 배신자가 있을까란 회의적인 생각을 품었지만 이제는 자신들의 실체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를 점검하게 합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로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단지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자신을 항상 경계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너무도 쉽게 예수님을 등질 수 있는 존재임을 우리 스스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럴 가능성을 열어두고 자신을 감시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더욱 충성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