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개혁은 저항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을 쥐고 있던 이들이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때론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심각한 타격을 입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예수님의 개혁의 바람은 당시 유대 사회의 기득권을 흔들어 놓았고 그 저항 또한 너무도 컸습니다. 유대 기득권층은 예수를 이대로 내버려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따를 것이란 극도의 불안을 느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들의 불안을 증폭시킬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란 장면은 그들의 염려가 단순한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유대 사회의 기득권을 쥐고 있던 이들은 예수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더 많이 그를 찾고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예수만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를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예수와 나사로는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비춰진 것입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유대 권력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그들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는’ 불편한 일을 일소에 제거하려 했습니다. 나사로의 존재 자체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을 부정하지 못하게 했기에 그를 죽이려한 것입니다.
예수의 오심은 죄와 죽음의 지배 하에서 멸망으로 치닫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세상 권력을 쥐고 있는 어둠의 세력은 이를 봉쇄하기 위해 당시 권력자들을 이용해서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나사로도 이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예수를 증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사로만이 겪는 독특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맹인으로 있다가 눈을 뜬 사람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 권력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를 출교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이 얼마나 거셌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세상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닙니다. 소위 힘 있는 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사용해서 억누른다면 이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경험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사로를 향해 이렇게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렇듯이 고달프다면 과연 이대로 계속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축복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함인데 이런 고난의 길을 따라가야 하느냐란 회의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그 고난 덕분에 우리는 평안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 고생을 하고 자식은 그 덕분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듯이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받을 고난을 면제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본문의 나사로는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아났지만 더 큰 고초를 겪에 되었으니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자로서 그를 믿고 따르면 우리 삶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을 자초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기에 그 길이 좁은 길이며 가시밭길일 수가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신앙적으로 넘어지게 됩니다. 그분을 따르는 인생이 어떠한지를 미리 단정짓지 말고 믿고 따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더 거센 저항에 부딪히는 경험을 한다해도 우리는 더 큰 용기를 갖고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