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히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어떤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다가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논점이 흐려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바로 이런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을 놓고 가룟 유다가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상태입니다. 가룟 유다는 향유를 판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자고 한 상황입니다. 비록 그의 속내는 그 돈을 몰래 훔치려는 것이었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제자들은 아마도 그의 말에 수긍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좋은 향유를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쓴다면 훨씬 더 유익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속내를 드러내어 ‘이는 도둑으로 이 돈을 훔치려 한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뒤에 가면 그의 실체가 모든 제자들에게 드러나고 맙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점입니다. 마리아가 가장 귀한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은 행위를 주님은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키면서 이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이는 어찌보면 뜬금 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가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차원에서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아낌없이 예수님을 위해 향유를 쓴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한 사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건과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셨지만 그들은 이를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애써 무시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고 따르고 있는데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이 죽게 된다면 이보다 더 허무한 것이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면 자신들이 누릴 것이 무엇인지를 열심히 계산하고 있는데 곧 죽게 된다고 하니 귀담아 들을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켜 다시 한 번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놓고 옳았느냐,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 아니냐란 논쟁을 하기보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하는지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만 마음을 쏟고 있을 뿐입니다. 삶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있어서 예수님의 목적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어떤 이는 가난한 이를 위해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위해 죽으신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가난한 이들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의 포괄적인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그룹에 국한시키는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모든 죄인을 위한 죽음이란 관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초점이 흐려지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어떤 특정한 그룹이나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 가난한 이들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죄인들이 다 그분의 죽음 앞에 서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제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역을 제대로 해낼 수가 있게 됩니다. 이 순서를 놓치면 초점이 흐려지게 되고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따라서 그분의 죽음이 모든 죄인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도록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