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우리는 ‘역지사지’란 말을 사용하는데,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물론 옳지 않은 것을 용납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상대방이 왜 저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보자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관리 중에서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라는 희소식이 들립니다. 사회의 관료층에까지 예수 믿는 신앙이 들어갔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우리로 느끼게 해줍니다. 하지만 곧바로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란 안타까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믿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힘있는 그룹의 위협 때문입니다. 이들의 위협은 ‘출교’라는 막강한 무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출교란 단지 어느 그룹에서 쫓겨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생활 기반이 뿌리뽑힐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는 무서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그들로 자신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이 묘사하는 실제적인 현장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구조와 위계가 어느 정도인지 체험하지 못했기에 실감나게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교가 두려워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해야 했던 그들의 입장을 무조건 외면만 해서는 안됩니다. 삶의 뿌리까지 흔들릴 정도로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신앙 생활을 해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실생활에 피해를 입는다면 우선은 그 상황을 기피하려 할 것입니다. 비가 오면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리처럼 적극적인 신앙 생활을 잠시 멈추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신앙 생활을 해야 하나란 회의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남들은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더 나은 삶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라는 근본적인 의심이 마음을 흔들어놓습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심정적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을 드러나게 말하지 않는 신앙 태도가 옳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도 이러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신앙인들을 향해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냉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출교라는 극단적인 위협 속에서 잠시 신앙을 비밀리에 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정죄한다면 너무 하지 않나란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까지 냉정할 정도로 이들의 신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일까요? 신앙적 후퇴나 옳지 못한 신앙 태도를 용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을 고려해서 이렇게 냉철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복음서를 읽고 있던 독자의 삶의 상황도 열악했기에 그들로 어떻게든 이를 극복하도록 용기를 줘야 했습니다. 이렇듯이 피해입는 것이 무서워서 신앙을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는 모습은 반복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언제든지 용납해서는 안되는 신앙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신앙 고백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면 안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든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이를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이 순탄치 않아도 그것을 이겨내면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함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신앙인들을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일은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신앙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