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수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예수를 믿지 않은 당대 유대인들의 모습은 요한복음서를 쓴 저자의 눈에는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많은 증거들을 보여줘도 그를 거절한 이유에 대해 본문은 명확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답을 구약 성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의 유대인의 불신앙이 매우 오래된 고질적인 병폐였음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서 저자가 찾은 해답은 이사야6:10인데 그 내용은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입니다. 이를 요한복음서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두 본문 사이에 내용 차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둘 다 같은 의도로 기록되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두 본문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크게 남에도 그 때나 지금이나 불신앙은 유대인들의 가장 골치 아픈 부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과 귀, 마음에 비유하면서 불신앙이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에 있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마음이 있어도 감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이 마치 하나님이 그들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오해입니다. 유대인들은 믿고 싶어했지만 하나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눈과 귀, 마음을 어둡게 해서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는 억측을 본문에서 유추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아무리 그들에게 기회를 줘도 눈이 멀고 마음이 둔해서 도저히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했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유대인들은 전혀 변하지 않아 보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철저히 낙제점을 받아든 모습입니다. 영적으로 고침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와야 되는데도 그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사야의 말을 자기 시대에 적용하면서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다 보여줘도 끄떡도 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고발했던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인간의 고질적인 영적 타락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감각도 없는 상태이기에 아무리 좋은 것을 보여주고 맛보게 해도 반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 하면서도 예수님의 종이 된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눈과 귀, 마음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으로 가능함을 그는 어디에서나 외쳤던 것입니다. 이는 니고데모에게 ‘성령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거듭날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외침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사람의 눈과 귀, 마음에 성령이 역사하신다면 그렇게도 완고한 사람일지라도 희망은 있습니다. 따라서 불신앙으로 격렬하게 맞서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간절히 의지해야 합니다. 또한 신앙으로 반응하는 이들을 만나면 하나님이 이미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 계시기 때문이라는 영적인 눈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가 불신앙으로 더욱 견고해질지라도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못하는 이유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뿐임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