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우리가 요한복음서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단어 중에 ‘표적’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무언가를 알려주거나 지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6: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입니다. ‘표적’은 볼 수 있는 그 어떤 것인데, 그것을 보고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과 왕의 신하의 아들을 죽을 병에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 중에서 아들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부분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적과 믿음의 관계를 설명한 것인데, 당시 유대인들이 표적을 믿을 수 있는 근거로 삼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표적을 적게 보여줘서 사람들이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0:30은 그가 보여준 표적들이 차고 넘쳤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이는 표적들이 부족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다는 핑계가 절대 성립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아무리 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어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해놓고는 실제로 보여주었더니 믿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유대인들이 나타냈던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 30절도,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유별나게 불신의 늪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 본문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들의 불신이 오래된 이야기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란 말은 이사야 당시 사람들의 불신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를 당대의 유대인들의 불신과 연결시키면서 이러한 불신이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귀한 증거입니다. ‘이것만 해결해주면 주님을 믿겠다’는 말을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인데, 진정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런 거래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주의 팔이 얼마나 강인하고 막강한지를 우리는 구약 성경을 펼치면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있던 수많은 이들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매순간 또 다른 인생의 문제를 가져와서 ‘이것만 해결해주시면 믿겠다’고 할 뿐이었습니다. 실제 그것을 해결해주면 과연 믿음으로 반응했는가에 대해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합니다. 그럼 지금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면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요? 명백한 증거만 보여주면 얼마든지 믿겠다고 하는 우리의 말을 신뢰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과 거래하는데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조건을 내걸고 충족되면 믿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거래입니다. 하지만 거래는 또 다른 거래로 이어질 뿐입니다. 진짜 믿겠다는 마음보다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픈 우리의 욕망이 분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명백한 증거만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을 사람들이 하는데, 이 또한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모든 불신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정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불신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 외에는 기댈 곳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믿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바꿔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임한다면 명백한 증거가 없어도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