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어느 순간 사람이 달라보일 때가 있습니다. 남과 다른 특별한 재능이 나타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시각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평범한 유대인으로 알고 있다가 뭔가 비범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행한 일들이 일반인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영역에 속했기에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예수를 왕으로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인 파장을 불러올만큼 위험하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사자인 예수님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놓고 아마도 당시 유대인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왕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눈 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겨우 나귀 새끼 위에 올라 타다니 누가 봐도 생경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무도 당연하게 이런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이 예언한 것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것을 예수님이 실행에 옮긴 것인데 이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임을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왕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오다니 과연 어떤 이들이 이것을 예상이나 했을까요? 심지어 그의 제자들까지도 이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가서야 이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영광을 얻었다는 것은 십자가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이후를 가리킵니다. 죽음을 정복한 이스라엘의 진짜 왕의 모습을 본 후에야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왕이 곧 예수임을 제자들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명심해야 할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 지금도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되새겨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셨기에 이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왕이 아닌 군림하는 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자꾸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나약한 왕의 모습이 아닌 세상을 정복할 정도로 막강한 화력을 지닌 위대한 왕으로 예수님을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 이후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지만 여전히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왕처럼 겸손하게 우리 안에 거하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로서 이러한 겸손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왕으로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듯이 낮은 자세를 취할 때 주님이 위대하신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 세력을 규합하고 세상을 호령하는 방식이 아닌 연약한 우리들이지만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비록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왕을 부끄러워하면 우리는 세상이 좋아하는 돈과 권력으로 실력을 행사하려는 유혹에 자꾸 빠지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아닌 우리가 쥐고 있는 권력으로 주님을 드러내려고 하는 모습은 가장 위험한 신앙 형태입니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겸손을 마음에 새겨두고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을 계속해 나갈 때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