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장 1절-3절 “누구를 위한 섬김인가?” 2021년 5월 18일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던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우리는 약간의 도움만 받아도 고마운 마음이 들 뿐 아니라 어떻게 보답할까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온도차는 있겠지만 도움을 준 사람에 대한 마음은 좋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목숨을 살려준 사람에게는 그 마음이 어떠할지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정성을 다해 생명의 은인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극진한 모습이 어떠한지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란 대목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그들의 마음이 어떠할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이 클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고, 나사로는 예수님 옆에 앉아 있으며, 마리아는 가장 귀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삼남매 중에 누가 가장 잘 섬기고 있느냐란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섬기는 것이 가장 훌륭한지를 놓고 서로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일, 예수님 옆에서 말씀을 듣는 일, 가장 귀한 향유를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귀한 섬김일까요? 본문은 이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섬기고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 셋은 한 마음으로 오직 한 분을 섬길 뿐입니다. 누가 더 잘 섬기느냐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준비한 것입니다. 언뜻보면, 마리아의 행동이 가장 두드러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의 행동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을 볼 때에 충분히 그렇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혼자만의 열심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을 표현한 것입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나사로와 마르다도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 다 그 무엇도 아까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면 안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섬김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에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신 예수님을 그들은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를 통해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섬기고 있느냐가 아닌 어떻게, 얼마나 섬겼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찾아내어 유대 권력자들에게 고발하려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렇듯이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아까워하지 않는 삼남매의 모습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우리에게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 세 명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도 이들 못지 않게 주님을 위해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놀라운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이는 그냥 말로만 해본 소리가 아닙니다. 호언장담하듯이 자기 과시용으로 이런 멋진 말을 내뱉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생명을 다 바쳤던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주님을 위해 살고 있다면 멈추지 말고 더욱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