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허무맹랑한 말을 믿고 투자했다가 전재산을 잃고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들릴 때가 있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에 속아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는 ‘만약 나라면 절대 속아넘어가지 않지’라는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속아넘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도 우리와 같이 매우 평범한 사람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이야기에 속아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진짜라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성경이 말하는 부활 이야기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려도 이것이 진짜라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 때 당시에 이 사실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기는 했지만 본문에서는 그냥 지나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매우 색다르게 죽음을 보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11절에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다음에 13절을 보면,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란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든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죽음을 잠든 것으로 본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나사로의 죽음을 잠든 것으로 본 예수님이 그 뒤에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죽음이 종착점이 아니라 정류장임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종착점이면 잠든다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정류장이면 거쳐가야 할 지점이기에 잠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임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각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잠든 것으로 본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죽음의 잠을 잔 이를 깨우시겠다는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이는 죽음이 종착점이 아닌 거쳐야 할 정류장 정도 뿐임을 확실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발상의 전환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독창적인 아이디어 수준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이며 실제로 일어날 일입니다. 죽은 자가 마치 잠을 잔 것처럼 어느 순간 깨어날 것이란 것은 꾸며낸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에 의해 반드시 실현될 엄연한 사실입니다. 물론 듣는 이들이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란 문제도 있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는 죽은 자가 잠을 잔 것처럼 나중에 깨어날 것이란 사실입니다. 바울도 이를 바탕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죽은 자들을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입니다.
죽은 자를 잠이 든 사람으로 이해하신 예수님과 신자들의 죽음을 예수 안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이해한 바울의 가르침을 종합해볼 때에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지를 결론내릴 수가 있습니다. 죽음은 종착점이 아니라 정류장일 뿐입니다. 이는 우리로 죽음의 공포를 뛰어 넘게 만드는 용기를 줍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이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죽음을 예수 안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생깁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것만 확실하다면 죽음은 절망이거나 공포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 지나칠 정류장일 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확실하다면 죽음의 공포도 우리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실제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올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안에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확실하다면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품고 죽음의 공포와 싸워 이길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