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51절-53절 “비교할 수 없는 죽음” 2021년 5월 14일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나사로는 중한 병으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는 어찌보면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원하는 복인지 모릅니다. 죽음을 피해갈 수 없지만 이렇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누구든지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셨습니다. 답은 너무도 명확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는다해도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사로처럼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죽은 이들이 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이 무의미해지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도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이미 일어난 사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를 믿는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기대하게 하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죽어도 살 수 있는 영생의 복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를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는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가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철저히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점을 매우 강력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의 쇠사슬을 끊어내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본문은 너무도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올 결과가 어떠한지를 묘사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예수님을 묘사한 세례 요한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오늘 본문은 예수의 죽음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 권력자들이 전혀 다른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53절,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들이 예수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민족을 위하고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그를 살해하려 했던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죽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예수의 죽음을 당시 흔하게 발생했던 정치적 죽음 정도로 치부하려 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놓고 사람들은 지금도 첨예하게 논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신해야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보배롭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란 표현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정확히 묘사했습니다. ‘우리를 건지시려고’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란 대목은 우리를 위한 그의 죽음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철저히 믿고 지켜내느냐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을 폄훼하고 왜곡시키는 주장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를 악한 세대에서 건져내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신 그분을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며 죄인이 구원받을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죽음 뿐임을 바로 여기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