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49절-50절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2021년 5월 13일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옳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이 둘이 서로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입금지란 표지판을 보면 그 곳을 가지 않는 것이 올바른 행동입니다. 하지만 호기심에 경고를 무시하고 금지 구역을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옳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행동은 그 지식과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낸 사건으로 예루살렘 전체가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중에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가야바가 일어나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엄청난 유익이라는 논리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반드시 죽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그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대제사장으로서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민족 전체를 망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이 지식에는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올바른 지식이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민족 전체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를 반대하는 행동을 그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구약 성경을 꿰뚫고 있는 사람인 듯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민족을 살린다는 구약의 가르침을 이렇게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구약이 예고한 메시아가 곧 예수인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약에 정통한 사람이지만 구약의 주인인 예수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죽어야 함을 알고 있지만 정작 가야바 자신을 위한 죽음인 것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위한 행동이 아닌 배척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 바른 지식이 개인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될 수 있는 매우 아픈 부분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읽고 설교로 듣고 성경 공부 시간에 배우지만 우리 개인의 삶에 어느 정도로 영향을 주는지 스스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에 발맞춰 지식화되고 있습니다. 학문의 깊이와 함께 자료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풍성히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느냐란 질문 앞에서는 너무도 빈약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지식은 최고 수준에 도달하고 있지만 삶에는 조금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이야기를 읽고 배우는 가운데 빠지는 함정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일 것입니다. 객관적인 지식을 머리 속에는 담아두지만 인격에는 이르지 못하게 막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느냐란 질문을 받게 되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정답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죄’ 속에 ‘나’라는 개인을 얼마나 깊이 적용시킬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개인의 삶에 얼마나 깊숙히 들어오셨는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이 우리 삶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야기가 ‘나’의 삶 전체를 바꿀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