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객전도란 말은 주인과 손님이 뒤바뀌었다는 뜻으로 일의 순서가 바뀌어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때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사건의 본질을 놓치고 주변적인 것에만 매달리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읽을 때 무엇이 본질인지를 놓칠 때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과 죽은 나사로 이야기도 본질이 무엇인지를 놓친다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죽은 자를 살리시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가서야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그 과정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늦춘 것과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대화, 유대인들의 반응에 대한 감정 표현 등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이 점을 더욱 명확히 말해줍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는 말에 사람들은 그 돌을 치웁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순서는 나사로를 살려내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진행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란 장면은 분명히 기도를 나타냅니다. 기도 내용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고 깊은지를 기도를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에서 의도성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에서 확인이 됩니다. 무엇을 믿도록 하려는 것일까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밝힐 뿐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것도 철저히 이 목적을 위해 실행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 일에 조금도 지장이 없다는 의미가 있음을 놓치면 안됩니다. 이 사건을 놓고 그 때처럼 오늘도 죽은 자를 살려내시면 믿겠다는 억지 주장을 하면 안됩니다. 기적은 필요에 의해서 행해지는 선물과 같은 일입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란 사실입니다. 이를 믿느냐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반응이 아니라 기적만을 추구하는 신앙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적은 성경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기적들만으로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아닌 불신이 우리 마음을 가득채울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중심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아직 살려내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믿게 하려 하신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작은 기적들을 통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반응은 여전히 우리 삶의 중심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가득채워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