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38절-40절 “설마가 현실이 되다니” 2021년 5월 7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에서 알 수 있듯이 공허한 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할 때에 특히 더 그렇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시는 분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것이란 말조차도 절대 공허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이 이 점을 매우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이후에 예수님은 그 누이인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 했으며, 이보다 앞서서 제자들에게 죽은 나사로를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들었던 제자들과 마르다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설령 알아들었다해도 ‘설마’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덤 앞에 선 예수님이 놀랍게도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무도 이상한 명령입니다. 당시 무덤은 굴로 되어 있었고 그 입구를 돌로 막아놓았는데 이 돌을 치우라는 것은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마르다도 이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완곡한 어법으로 이것이 매우 이상하고 비상식적인 일임을 표현했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거절 의사를 확실히 나타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무덤’과 ‘죽은 자’란 말이 반복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는 말을 했으며 시체가 썩기 시작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덤을 열어놓으라니 마르다가 반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르다를 향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면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울 것을 다시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요? 사실 마르다의 믿음과 관계없이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실 것입니다. 마르다의 반응에 따라 달라질 문제가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은 마르다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믿음’이란 단어가 쓰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적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믿음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에 대한 태도로서 믿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열고 죽은 자를 살려내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녀가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믿음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마’라 여겼던 일들이 현실이 되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과연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상식 선에서 미리 예단하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 그것이 얼마나 귀한지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적인 불행인데, 우리의 삶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서글픈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해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볼 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윤택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