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시점에서 예수님이 장례식장을 찾아가셨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조문하러 와서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 그 옆에서 함께 울었을 정도로 그들의 위로는 진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조문객들의 우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조문객으로 온 당시 유대인들이 이 눈물을 놓고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본문 36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란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눈물을 사랑의 표현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다르게 본 이들도 있습니다. 본문 37절에서 우리는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란 차가운 반응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맹인의 눈도 뜨게 했다면 그 능력으로 나사로가 죽지 않도록 치료할 수 있었지 않냐라는 비난이 섞인 감정이 드러난 것입니다. 눈물의 의미을 놓고 다양한 해석을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의 정황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이들도 이렇듯이 상반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운 뿐입니다.
예수님의 나사로를 향한 사랑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변 이웃들도 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놓고 눈물을 흘린 예수님을 향해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그 사랑이 의심받고 있습니다. 진짜 사랑하셨다면 왜 그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느냐란 이유 있는 항변 때문입니다. 무능한 예수님이라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겠지만 맹인의 눈도 뜨게 하셨기에 죽기 전에 병을 치료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이런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성경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로 듣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아주 작은 문제 하나 해결해주지 않을 때에 이런 의심이 싹틉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불행을 겪으면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쪽인가요? 아니면 불행을 막아주지 않은 것을 놓고 의심하는 쪽인가요?
중한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신앙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쓰럽고 안타깝지만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깊고도 풍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란 또 다른 목소리 앞에서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할 것인지, 의심할 것인를 놓고 매순간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잘 알 것 같다가도 어떤 불행한 일을 겪게 되면 그 사랑을 쉽게 의심하고 맙니다. 맹인의 눈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 우리의 삶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확인하고픈 마음이 생깁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렇기에 이를 경계하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만 확인하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사랑의 모든 것을 증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족하다는 신앙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일상의 문제가 해결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확신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