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33절-35절 “함께 울 수 있는 마음” 2021년 5월 5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람의 감성은 이성과 함께 뭔가를 감각하고 지각하는 인식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감성은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성이 메마른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달리 정서적인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울 때 울고 웃을 때 웃을 수 있는 정서적인 반응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웃었다는 표현은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감성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을 보면 감성이 풍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묘사는 이를 잘 반영해줍니다. 이 뿐 아니라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란 표현도 그의 뛰어난 감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감성을 저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경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감성이 풍부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시는 분이십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 죽음에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통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한 감정 표현 그 이상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와 조문객들의 우는 모습과는 다릅니다. 이들의 눈물은 상실에서 오는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 표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의 횡포에 지쳐 있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이들의 절망을 보시면서 흘리신 것입니다. 이는 슬픔에 젖은 감성적인 눈물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겪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반응입니다. 죽음 앞에서 눈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이 눈물에는 죽음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죽음에 어떤 응징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하는 우리와는 달리 예수님은 죽음을 종결시키고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시는 분으로 눈물을 흘리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위로의 차원에서 함께 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만 본다면 우리는 너무도 중요한 가치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우시는 것은 단순한 공감과 위로 차원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로 죽음을 직시하고 그것의 횡포에 눈을 뜨게 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소망하도록 이끌어 주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눈물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우리는 슬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우리 옆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눈물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신 이로서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이들처럼 눈물만 흘릴 수 있습니다. 죽음이 코 앞으로 다가온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막연히 좋은 곳에 가셨다라는 위로만 할 뿐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서 대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죽음 앞에서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느끼는 슬픔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이들처럼 슬퍼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함께 눈물을 흘리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소망이 충만한 상태에서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눈물의 가치를 안다면 우리는 절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을 품고서 함께 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