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친밀한 관계가 어색해지면서 서먹한 사이로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 서로 멀리하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이후 마르다와 마리아는 실제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오빠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고 결국 오빠는 죽고 맙니다. 두 자매는 아마도 서로 예수님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표출했던 것 같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서운한 감정의 온도차는 서로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훨씬 더 격한 감정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러 갈 때에 그녀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던 것을 볼 때에 그런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마르다처럼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예수님을 만나뵙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하자마자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는’ 장면에서 이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단숨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합니다. 주저없이 그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속에 담아둔 서운한 감정을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란 말로 토해냅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겠다는 그녀의 의지입니다. 한 때 서운했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오빠의 죽음과 제 때에 도와주지 않은 예수님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느냐입니다. 마르다를 통해 마리아에게 전달된 예수님의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했던 장면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음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마리아의 회복을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를 다시 부르심으로 새로운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불편한 감정을 해소시키고 관계 회복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아주 귀한 영적 교훈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존심 싸움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을 진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관계 회복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함에도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넓은 마음입니다. 마리아의 미숙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먼저 부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감정 싸움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놀라운 변화들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 있는 행동이 이어진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멋진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기대를 품고 넓은 마음으로 대할 때에 주님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풍성한 은혜를 맛보도록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