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27절 “내가 믿습니다” 2021년 5월 3일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사람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이들이 확인되지 않는 악한 소문과 악평에 시달리다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일들을 가끔씩 보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그 사람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도 한 편으로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선한 일과 차별화된 메시지, 겸손함 등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에 대한 악평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거나 신성 모독을 자주 한다는 악한 소문들이 휘몰아쳤습니다. 이런 가운데 가장 난감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일 것입니다. 사회의 주류 그룹으로부터의 배척이 더욱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그를 계속 믿고 따를 것이냐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불행이 찾아옵니다. 마르다의 경우 사랑하는 오빠인 나사로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기에 이 불행을 조금도 막아주지 못하는 예수님에게 얼마든지 실망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요청했지만 제 때 해결해주지 않는 모습에 실망은 절망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이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에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란 목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오빠인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상태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믿느냐를 확인하고 있으니 더욱 실망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놀라운 모습을 보입니다.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에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에 대해 ‘주여 그러하외다’고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믿나이다’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실망과 분노, 절망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백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욱 더 놀라울 따름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믿습니다’고 했으니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고백이 가능한 것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마음 때문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오빠인 나사로의 죽음도 이 고백을 무효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퍼져 있는 예수님에 대한 악한 소문들도 이 고백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참다운 신앙 고백은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흔들림없는 신뢰 속에서 나옵니다.

‘내가 믿습니다’란 마르다의 고백을 우리는 흘려들어서는 안됩니다. 맹목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태에서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고통과 비극을 온 몸과 마음으로 체감하면서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는 사막 같은 곳에서 온갖 모래 바람을 맞아가면서 견뎌낸 신앙 고백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지적인 동의나 습관에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와르르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요? 어떤 환경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전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신앙 고백하고 있는지, 불안과 고통, 아픔을 겪으면서 신앙을 붙들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이론적인 완벽한 신앙 고백 보다는 삶에서 나온 진국같은 신앙 고백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삶의 온갖 비바람을 맞으면서 형성된 신앙 고백은 뿌리깊은 나무처럼 견고할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어디서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을 담대히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