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신뢰가 두터워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단순히 객관적인 정보를 많이 알고 있거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것으로 신뢰가 깊어지지는 않습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하듯이 때론 실망하고 배신감도 느끼는 가운데 이를 극복하고 신뢰하게 되면 그 견고함은 매우 두터워질 것입니다. 마르다는 평소에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향한 신뢰심도 매우 컸습니다. 예를 들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말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그냥 해 본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안다’고 말할 정도로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한 반응인데,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매우 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을 것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정도인 마르다에게 더 깊은 신뢰를 요구하는 말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를 묻는 너무도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질문은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히 얼버무리듯이 넘어갈 사안이 아닙니다. 반드시 상대방의 대답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란 선언은 눈 앞에 있는 예수가 과연 누구냐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과연 예수란 사람이 부활이요 생명일 수 있느냐란 질문에 마르다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말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나사로가 죽은 상태에서 이 말이 들린 것인데, 그렇다면 그가 살 수 있다는 말이냐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와 그를 믿는 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한 묶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이 자기를 믿는 사람의 죽음까지도 해결하실 수 있다는 선언이기에 이 둘을 분리하면 안됩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죽어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란 말씀도 매우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죽은 나사로와 살아 있는 마르다에게 적용되는 메시지입니다. ‘죽어도 산다’는 것은 나사로에게 해당되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마르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체감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미 죽은 자라도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라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또한 아직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메시지입니다.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작용하며 내용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마르다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입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반응을 요구하신 것을 볼 때에 지금 여기서 그녀는 어떤 대답이든 해야 합니다. 믿어야 할 내용의 수위가 너무도 높아서 어떻게 대답할 지 깊이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에 대해 우리도 답을 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가’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수 있으며,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함을 믿는가’에 어떻게 반응할지 결단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 앞에 우리는 날마다 서야 합니다. 이에 대해 정직한 답을 하면서 우리는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