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사람들은 가끔 호언장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분수에 맞지 않는 말을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인데, 과장이나 허풍일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해낼 수 없는 일을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내뱉는 실수를 합니다. 예를 들어, 지갑에 신용 카드도 없이 단돈 10달러 밖에 없는 사람이 10명의 식사비를 당장 내겠다고 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막상 행동에 옮겨야 되는 상황이 오면 온갖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갈 것입니다. 문제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함부로 하면서 자신의 신용만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할 당시 유대인들은 그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말을 함부로 내뱉고 다닌다고 비난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 한 것입니다. 과연 유대인들이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까요? 미친 사람의 허황된 말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허황된 말을 하는 듯한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11절에서 이미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기에 지금 당장 살아난다는 의미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죽은 자가 당장 다시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났고 이미 무덤에 들어간 나사로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곧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과연 마르다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마르다는 당시 부활을 믿는 유대인들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말을 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안다’고 반응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르다만이 갖고 있던 독특한 신앙이 아닙니다. 당시 정통 신앙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이라면 일반적으로 믿었던 부활 신앙입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란 예수님의 말을 마르다는 자신이 평소 믿고 있던 부활 신앙 정도로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다시 살아난다’와 마르다가 말한 ‘다시 살아난다’가 같은 말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똑같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한 것인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나사로를 지금 당장 살려내겠다고 하신 반면에 마르다는 먼 미래에 일어날 부활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설마 지금 여기서 죽은 자를 살려내시겠느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부활이 눈 앞에서 일어날 것이란 상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마르다의 모습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에 대한 거리감은 신앙인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저 멀리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오늘이라는 시간에 부활은 막연하게만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시간에 부활을 실제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죽음만 볼 것이 아니라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낙심할 수 있지만 지금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마르다 옆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죽음까지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옆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죽음과 그것의 열매들이 우리 삶을 뒤흔들어놓을 수가 없어야 합니다. 죽음이 우리를 위협하지만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이를 능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위로의 말씀이 실제로 힘을 발휘한 것처럼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의 힘이 죽음 앞에서도 우리를 굳건히 세울 것입니다. 이렇듯이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