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우리는 평탄한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삶을 뒤흔들어놓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삶의 위기 한 가운데 서게 되면 사방이 막힌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도움을 구해보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때에 세상이 다 원망스러워집니다. 이 때에 사람들은 ‘만약 신이 있다면 어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란 절규를 합니다. 신을 향한 원망이 하늘을 찌릅니다. 신앙인이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과거 한 때 열심히 신앙 생활했던 이들이 걸려 넘어지는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한 사람을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는 마르다인데, 가장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지만 신앙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든지 예수님을 원망하며 관계를 끊을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갔던 것입니다. 오빠의 죽음 후에 방문하신 예수님을 향해 그녀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고 말합니다. 이는 소망이 가득한 목소리입니다. 비록 오빠가 죽었지만 절망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하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얼마든지 원망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이를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본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미리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이 하나님을 향해서는 원망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 왜 이렇게 죽도록 내버려두셨냐란 분노의 감정이 솟구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마르다처럼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가 있을까요? 충분히 미리 막을 수도 있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신뢰해야 하느냐란 생각을 떨쳐낼 수가 있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마르다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님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위기들을 어떤 자세로 극복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예수님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을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어떤 어려움도 허락하지 않고 보호하기만 하시는 예수님을 꿈꾼다면 신앙 생활이 위태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신앙만을 진짜라고 믿는다면 마르다가 오빠의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인 것을 절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는 것만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오히려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죽는 것이 유익할 수가 있을까요?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살았다면 죽음도 비켜가야 하지 않을까요? 바울처럼 모든 인생을 주님을 위해 바쳤다면 사는 것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축복을 다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갇힌채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렇게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듯이 죽음을 목전에 둘 때에 진짜 모습이 나타납니다. 고통 속에서도 원망이 아닌 소망을 품는 것이 신앙의 진짜 얼굴입니다.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위기의 순간마다 원망으로 채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소망으로 우리 마음을 채운다면 우리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삶의 위기 앞에서도 주님의 은혜 속에 머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