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17절-20절 “상실의 아픔이 있는 곳에” 2021년 4월 27일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면 그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하게 되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그 자체로 정신적, 정서적 타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가정에서 일어난 비통한 장면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이 때에 그의 나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로 추정해 볼 수가 있습니다. 두 누이와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을 볼 때에 마치 소년 가장처럼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같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것을 볼 때에 그의 나이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정황이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이 얼마나 그 가정에 충격적이었을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누이들이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은 상당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죽음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던 두 누이를 위로하기 위해 많은 조문객들이 방문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이 장면은 인간적인 위로가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나사로와 두 누이를 평소에 잘 알던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감사하게도 이들이 조문하러 온 것입니다. 이것만해도 두 누이 입장에서는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누이에게는 풀리지 않는 속앓이가 있습니다. 오라비가 죽기 전에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일 때문입니다. 충분히 올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너무도 늦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이에 그만 오라비는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그들은 어떤 감정에 휩싸였을까요? 예수님이 조금만 서둘렀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크게 상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이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때에 두 누이가 보인 반응은 이렇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두 누이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상실의 아픔 앞에서 보인 너무도 상반된 반응입니다. 마르다는 곧바로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갑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있기만 합니다. 물론 이것을 놓고 누가 옳으냐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단지 상실의 아픔이 있는 곳에서는 아무리 신앙인이라도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만 확인하면 됩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특히 17절에서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란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일부러 늦게 오신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보시기 위해 직접 오셨다는 이 장면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상실의 아픔이 있는 자리에 오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두 누이는 상실의 아픔이 없도록 막아주기를 너무도 간절히 원했지만 예수님은 상실의 아픔이 이미 일어난 곳에 오셨던 것입니다. 죽음이 일어나고 조문객들이 찾아오고 가족은 실의에 빠져 있는 우리의 인생 속으로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요? 상실의 아픔이 있는 곳에 오시기 보다는 그런 일 자체가 없도록 만들어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우리의 생각에 뭔가 교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상실의 아픔은 누구나 겪고 싶어하지 않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그 옆에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와 함께 슬픔을 나누시는 우리 주님의 따스함을 우리는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실의 고통을 왜 허락했느냐고 원망하기보다 좀 더 성숙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어도 바로 이 곳에 오셔서 함께 슬퍼하시는 주님의 위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남은 자로서 우리가 이 땅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