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물론 초대하는 사람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초대를 받으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 즐거움은 초대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얼마든지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로부터 초대를 받는다면 떨리기도 하지만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이제는 허락을 해준다는 의미로 초대를 한다면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시인은 그의 독자들에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함께 예배드리자고 초청한 것입니다. 시인은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혼자 드릴 수도 있지만 함께 드릴 때 훨씬 더 힘이 생깁니다. 시인은 혼자 예배드릴 수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즐거이 외치자”고 말합니다. 혼자 드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고는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함을 시인은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그는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고 하면서 예배가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룩한 행위임을 강조합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행위는 이렇듯이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품고 경배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혼자만이 누릴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나눌 때 그 행복은 차고 넘침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함께 예배드리는 일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혼자 예배드리지만 공동체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까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시인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인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라고 답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비교 불가한 분이신지를 매우 명확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인정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안다면 시인처럼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배자로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하나님이 주관적인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크신 왕이라 말하지만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란 믿음이 없다면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냉랭한 예배자가 되는 길은 하나님의 구원 체험 없이 형식에만 얽매일 때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우리의 인격을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체험한 자로서 예배할 때 예배의 감격은 되살아납니다. 예배의 감격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다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로 부르신 하나님을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