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개인적으로 허리 통증을 느낄 때 진통제를 복용합니다. 가급적 복용하지 않으려 하지만 통증이 심해지면 어쩔 수 없이 진통제를 찾게 됩니다. 통증은 반갑지가 않은 불청객이지만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진통제는 반가운 약입니다. 통증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통증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통증을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반감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왜 통증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가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통증이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중요한 신호란 생각에 이르자 하나님의 선물로 본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몸에 이상이 생겨도 눈치채지 못하게 됩니다. 통증이 느껴져야 의사를 찾게 되고 치료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통증은 불청객이지만 더 큰 위기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통증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통증을 느끼는 모습입니다. 이 기능이 고장나 있다면 우리는 매우 심각한 영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영적 통증 기능이 상실되어 있다면 영적으로 문제 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느끼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들려지는 영적인 감각을 깨우는 말씀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는 영적 감각은 영적인 통증에 매우 민감할 때 나타납니다. 영적 통증을 예민하게 느끼는 신앙인은 작은 죄에도 기민하게 반응합니다. 죄에 대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시인처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죄를 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민감함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적인 통증에 예민한 신앙인은 시인처럼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다. 죄를 단순한 실수로 여긴다면 이런 기도를 절대 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진 상태라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영적 상태에서는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는 시인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 통증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란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란 기도를 할 수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우리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우리가 갖는다면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를 우리에게 베푸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