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계십니까?” (시편115편 묵상) – 7/17/2020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인이라 생각한 사람이 대학에 들어간 이후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이는 이것을 ‘역회심’이라 말합니다. 신앙을 버린 이유로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인들은 증거와 이성이 아니라 무조건 믿으라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 만연한 악의 문제를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선하고 전능한 신이 세상을 주관한다면 어찌 이렇게 악이 기승을 부리도록 내버려둘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오늘 시편을 보면,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란 탄식이 나옵니다. 무신론자들의 공격 앞에서 교회는 지금도 이와 같은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보라’고 다그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당황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고 말입니다. 하늘에 계시기에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내고 계심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을 숭배하는 대신에 보이는 존재로서 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상’이라 부릅니다. 우상의 특징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으로 치장하고 가장 정교한 솜씨로 빚어낸 존재가 우상입니다. ‘우상’이라 칭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려 한 것이지만 우상을 섬기는 이들은 그것을 신적인 존재로 추앙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우상을 신으로 추앙해도 성경은 이에 대해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는 시인의 날카로운 분석은 우상을 신으로 섬기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를 드러냅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우상을 섬기는 세상을 향해 신앙인들이 절대 휩쓸려서는 안됨을 강력히 외친 것입니다.
우리는 말하시고, 보시고, 들으시고, 냄새 맡으시고, 만지시고, 걸으시며, 말을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신론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는 말처럼 실제로 우리를 도우시고 막아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심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어디에 계십니까”란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무신론자로서가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로서 이 질문을 합니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몸부림입니다. 지금 어디에 계시냐고 계속 물으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은혜로우신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어디에 계십니까’란 질문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