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잊지를 못해서 고통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잊고 싶지만 더욱 또렷해지는 과거의 기억으로 매일 신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픈 기억은 몸에 난 화상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어서 그냥 평생 동반자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지워서는 안되기에 계속해서 기억을 재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바벨론 포로 생활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입니다. 지워서는 안되는 아픈 기억입니다. 국가적으로 수치를 당한 날일 뿐 아니라 오랜 시간 포로가 되어 온갖 고통을 당했던 민족의 시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만 볼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들을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바벨론 포로는 기독교인에게도 아픈 기억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시대, 문화, 민족, 국가를 넘어 바벨론 포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아픈 기억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경험입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서 겪었던 기억이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를 수 있습니다. 여전히 회복이 되지 않아 신음하듯이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란 심적 고통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시인은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아픈 기억을 안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 인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좋은 기억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말에는 시인 자신도 포함됩니다.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픈 기억이 우리 신앙 생활 전체를 방해하도록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를 잊지 않도록 우리는 아픈 기억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는 창조 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만을 위한 수호신으로 여기지 않고 온 우주의 왕으로 고백하는 이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실망했어도 여전히 온 세상의 창조주로 계심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실패한 경험이든 버려진 경험이든 아픈 기억은 우리 신앙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밤과 낮, 겨울과 여름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원수들이 주의 백성들을 짓밟고 비방하고 괴롭혀도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신의 뜻에 따라 운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시인처럼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우리는 여기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에 깊숙히 개입하셔서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