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약속하는 말들이 차고도 넘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건강에 쏠려 있음을 반증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건강해지자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의 관심은 육체의 건강에 있습니다. 육체적 건강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확인되기에 그것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서적인 건강, 사회적 건강 등을 외치지만 몸의 건강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몸을 더 건강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아이템이 나오고 효과가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몰려들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몸의 건강을 보장해주는 신앙 생활을 사람들은 원합니다. 몸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신앙 생활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입니다. 몸이 건강해야 신앙 생활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시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말합니다. 몸의 건강이 복받은 것이라 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것은 몸의 건강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몸의 건강과 무관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몸이 약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몸이 건강해도 그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몸의 건강이 목표라면 하나님의 뜻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의 건강과 상관없이 주님을 위해 살 수가 있습니다. 몸의 건강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목표를 바꾸어야 우리는 이 사회에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부와 재물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이 올바른 일에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몸의 건강이 목표인 사람과 하나님의 뜻이 목표인 사람은 부와 재물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시인은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고 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목표인 사람은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로서 살아갑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는 실천적 신앙 생활을 합니다. 시인은 실천하는 신앙인을 향해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할 뿐 아니라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고 칭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라”고 자신있게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여러 가지 욕망을 부추긴다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건강한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