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스러울 때” (시편135편 묵상) – 8/10/2020

시편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가 ‘송축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찬양하자고 권면하는 것은 삶 속에서 이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오늘의 시편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쓰여진 것 같습니다. 시편 중간에 우상의 무용성을 자세히 언급한 것을 볼 때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열국의 우상”이란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이 섬기던 신들을 가리킵니다. 이 우상들이 이스라엘 안으로 깊숙히 들어와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런 일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신앙을 기록한 역사서(열왕기서, 역대기서)를 보면 끊임없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진실성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채 행하는 가식일 뿐입니다.

우상 숭배에 빠지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러한 이중성을 이스라엘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지 않는 것을 우상에게서 얻으려 하는 심리가 강력하게 작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센 분으로 알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하시는데, 왜 이렇게 삶이 팍팍하고 고달픈지 모르겠다는 상한 감정이 생기면 하나님의 선하심까지도 의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선하신데 능력이 없으시거나, 능력이 무한하신데 선하지 않으시다는 이상한 모순에 걸린 것입니다. 과연 이런 신앙인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동시에 강력히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릇된 신앙관을 고치는 올바른 방식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라면서 그 증거로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라”를 제시합니다. 이스라엘만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지를 깊이 깨달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시인은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고 선포합니다. 그 증거로 그는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엄청난 선언입니다. 예를 들어, 초강대국인 애굽의 장자를 치신 사건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강력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면 이보다 더 든든한 일이 없다는 점을 시인은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실망스럽게 느껴질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시인처럼 다시 되새기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아끼시는지를 계속해서 묵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세상의 수많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도울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는 시인처럼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선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렇게 찬양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