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선수가 다친 후 치료 과정에서 재활 기간을 갖습니다. 부상의 경중에 따라 재활의 기간이 결정됩니다. 이 시간을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수로서의 생명이 달라집니다. 재활에 성공한 이들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부상도 재활 기간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이지만 신중하고 세심하게 다루어야 마음이 건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방치하면 마음의 병이 깊어지게 됩니다. 신앙의 영역도 재활 기간이 필요합니다. 신앙적으로 상처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그 상처를 얼마나 세심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신앙의 회복이 달라집니다. 신앙인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상처를 입을 수가 있는데, 그것을 방치하면 신앙을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신앙적 재활 치료는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매우 현명한 방식입니다.
기도는 영적 에너지를 얻는 중요한 통로이지만 때론 신앙 상처를 입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시인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화를 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낯선 장면입니다. 시인의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시인의 개인적인 감정 상태를 표현한 것일까요? 하나님이 정말 기도에 대해 화를 내신 것일까요? 무엇으로 하나님이 기도에 대해 화를 내신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고 한 뒤에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주의 백성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기도에 대해 화를 내신다고 할까요? 비참한 현실을 바꿔달라고 기도했음에도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해 화를 내시는 하나님이란 인식을 갖고 있음에도 시인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요? 그는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화를 내는 부모님께 다가가지 못하는 자녀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고 생각하면 선뜻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더욱 깊은 함정에 빠뜨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로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비참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적으로 재활 기간을 전혀 활용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회복할 기간에 상처를 더욱 키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치료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회복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는 회복의 기도를 매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우리를 소생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새롭게 할 것을 확신할 때 더욱 강력해집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