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가장 민감한 주제입니다. 철없는 아이라 할지라도 공평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으면 반박합니다. ‘이것은 공평하지 않아요’라면서 불평을 나타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사회가 있을 수 있을까요? 사회가 언제나 공평하게 움직이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도 공평에 있어서 완벽하지 않음을 잘 압니다. 우리가 어느 사회에 살든 공평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공평하지 못한 대우를 받으면 억울한 감정이 생깁니다. 억울함은 불평으로 이어집니다. ‘왜 나만 손해봐야 해’란 억울함이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됩니다. 공평하지 못한 일을 당했음에도 억울해하지 말라거나 불평하지 말라고 하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요? 억울함으로 인한 불평을 틀어막으면 더 큰 분노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요? 제도와 관습으로 불평을 잠시 잠재울 수 있지만 사람 마음 속에 있는 불공평함에 대한 불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시험을 받곤 합니다. 신앙 시험을 통과하면 믿음이 더욱 커지고 확고한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신앙적으로 흔들리거나 신앙을 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납니다. 신앙 시험 자체가 없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 중에 하나를 오늘 시편의 저자가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을 행하는 이들로 인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불평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형통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온유하고 화평을 추구하는 이들은 약하고 가난해지는 반면에 악인들은 돈과 권력을 쥐고 힘을 과시하는 사회라면 불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이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고 하지만 여기는 신앙적인 깊은 고민이 묻어납니다. 정직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선으로 행하는 성숙한 인격을 갖춘 이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진다면 과연 누가 선을 추구할 것인지를 시인은 고민합니다. “종일토록 은헤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을 때 신앙적으로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불공평한 사회에서 공평하지 못한 일을 당하면서도 신앙적으로 시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처벌하시면 될까요? 악을 행하면 즉시 벌을 받도록 하는 사회라면 괜찮을까요? 그렇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를 소망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분노와 불평이 또 다른 악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공평한 사회와 사람일지라도 기회를 주시는 측량하기 어려운 넓은 마음을 갖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는”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앙인들을 버리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영원히 보호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