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한 사회일지라도 지위의 높낮이는 존재합니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만 기능적 차원에서 위아래 구분이 생깁니다. 회사에서 상사는 부하 직원을 지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로인해 자연스럽게 사람 사이에 높낮이가 형성됩니다. 낮은 위치의 사람이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보이지 않는 룰이 작동합니다. 하지만 이런 차원에서의 섬김은 기계적이고 비자발적인 측면이 매우 강합니다. 이것을 정면으로 반박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섬김의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모습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으시고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높낮이 차원이 아니라 사랑의 차원에서 접근하신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죄인을 위하여 내놓으실 정도로 섬겼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비교불가할 정도로 막강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시인은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성전을 섬기는 당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향해 던진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섬기는 자로서의 의무를 강조하는 듯이 보이지만 ‘송축하라’는 말에는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섬기는 자로서 송축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의무적인 찬양을 독려하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습관적, 반강제적인 찬양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송축하라’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진정 있느냐란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말도 섬기는 자로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은 단순히 거룩한 자세를 뜻하지 않습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오늘의 문화에서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가 있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진정한 섬김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사랑과 존중을 담아낸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뒤틀리고 왜곡되는 현상이 우리 문화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진실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이것을 지켜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상태를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이러한 섬김이 예배를 통해 드러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시인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고 하면서 그 은혜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이 은혜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복’이란 말이 세상적, 육신적, 물질적으로만 이해되는 우리 문화권에서는 이 복이 얼마나 귀한지를 놓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오는 복이 어떨지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고 날마다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존중으로 섬기는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