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감정” (시편109편 묵상) – 7/10/2020

시편에는 ‘저주의 시’에 속하는 시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시인은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란 저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 신앙인으로서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주의 기도가 과연 합당할까요? 하나님이 저주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신약은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했는데, 시편의 시인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저주하면서 기도해도 될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기를 죽이려 하는 이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우리가 저주의 기도를 대할 때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면서 신앙의 힘으로 고통을 이기고 있습니다. 그의 고통은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었지만 상대방은 악으로, 미움으로 되갚았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악한 일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을 말합니다. 이렇게도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는 상대를 사랑으로 대하고 선을 행할 뿐 아니라 기도만 했을 정도로 인내의 시간을 보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신앙이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심에 저주의 기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악이 퍼지면서 무고한 이웃들이 희생당하는 현실에 눈감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개인적, 사회적으로 불의가 기승을 부리는 현실에 눈을 뜬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상한 감정 상태에 있습니다. 선을 행할수록 상한 감정도 커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고 있으나 상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이 강자에 의해 짓밟히는 현실을 보면서 상한 감정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상한 감정 상태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복이 아니라 악의 고리를 끊고 싶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이 해결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죄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상한 감정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건강한 모습입니다. 죄를 묵과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하는 열심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죄에 쉽게 눈감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회복될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건강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