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자녀 사랑은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물론 가끔 부모의 왜곡되고 비뚤어진 사랑이 뉴스에 보도가 되기도 하지만 자녀를 위한 희생적 사랑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만 때론 그것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를 교육적 차원에서 엄하게 대할 때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는 경우입니다. 잘 해주면 사랑하는 것같고 야단을 치면 미워하는 것같은 느낌을 자녀들이 받습니다. 사랑하지만 옳지 않은 일에 대해 꾸짖는 일을 해야 하는 부모의 입장을 어린 자녀들이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대하는 우리로서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다각도로 접하게 됩니다. 어떤 사건과 인물에 대해 하나님이 때론 사랑으로, 때론 정의로 대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해할 지를 묵상합니다.
시인은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찬양하는 시인의 마음 자세를 보여줍니다. 사랑과 정의에 대한 기계적인 균형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적인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어떤 모습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기계적인 균형에 너무 매달린 것은 아닌지, 또는 한 쪽에 치우쳐 편향된 시각에 붙들려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논쟁적일 수 있지만 겸손한 자세로 대해야 할 거룩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완벽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주제를 대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시인은 사랑과 정의를 찬양하면서도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바라는 태도입니다. “완전한 길을 주목”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고자 하지만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매순간 사랑과 정의를 저울추에 달듯이 균형잡기보다 상황별로 판단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시인은 정의가 필요한 상황에서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하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는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겠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악과 타협하고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물론 사랑 없는 정의만을 외친 것은 아닙니다. 무자비한 보복을 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악을 용납하고 죄와 손잡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우리로서 어떤 상황에서 사랑을 또는 정의를 내세울지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나는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겠다는 마음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