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명 연예인이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다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인생이 무너진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고 최선을 다해 달려왔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모든 것이 허망하게 끝날 수 있다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절망적인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강력한 펀치를 맞고 쓰러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이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삶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개인을 뛰어넘어 국가 전체가 엄청난 시련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민족의 아픔을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다”고 진술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당한 사건을 언급한 것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다”고 비참했던 장면을 묘사합니다. 죽은 자들이 길거리를 채웠고 시체를 매장해줄 사람들이 없는 장면은 비극 그 자체입니다. 살아 있는 이들은 괜찮을까요? 시인은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주의 기업의 땅”에서 살았고 그들은 “주의 종들”이며 “주의 성도들” 입니다. 그들은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들”입니다. 하지만 강대국인 바벨론의 침략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이렇게 비참해진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시인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마치 애굽 치하에서 비참하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참해질수록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모습입니다.
비참한 현실 앞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낄 수 있지만 우리는 시인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으며 이 험한 세상에서 건지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비참해질수록 우리는 더 강력히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란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망 선고를 받을지라도 우리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주의 크신 능력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며 주의 양들입니다. 우리가 비참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