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음에도 그것을 포기하고 고생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가치관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가치관 차이가 있기에 모든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조건과 환경일지라도 가치관이 달라 상반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사느냐는 것은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가치관의 변화가 한 사람 안에 일어나는 일은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그 사건을 거치면서 가치관에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신앙이 들어가면 삶의 가치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시인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가치관의 변화가 그에게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주의 궁정’에서 하루를 사는 것과 ‘성전 문지기’로 지내는 삶을 선택한 시인의 모습은 그의 가치관에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의 인생관이 크게 달라져 있습니다.
시인이 말한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에서 우리는 그에게 일어난 가치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주의 장막’을 보는 눈이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의 장막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은 결과입니다. 그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할” 정도라고 말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오래되고 깊은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하면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주와 함께 사는 인생이 얼마나 가치있는지를 그는 매우 깊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인도 지금 그런 인생을 살고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생기면 누구든지 주와 함께 사는 인생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다른 어떤 삶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는 시인처럼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께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로 지날 때에도” 하나님이 “그 곳에 많은 샘”을 준비해 주심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란 소망이 가득한 마음으로 이 땅을 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와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는” 사람으로 우리는 이제부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 불가한 새로운 인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축복을 우리는 여기서 누릴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