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란 말이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지켜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켜주고 싶어도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사고가 나면 부모의 심장은 찢어질 듯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지켜주지 못한 자책의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좀 더 안전한 방법을 사용했더라면 하는 후회에 가슴을 칩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일은 쉬운 것 같지만 때론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 능력의 한계 뿐 아니라 세상 구조로 인해 모든 위험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능하고 전지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가 보호한다면 완벽하게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시편도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심을 강력히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능력의 무한하심을 천지 창조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고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지키는 자로서 가장 큰 약점은 졸리는 것입니다. 적의 공격을 미리 알려주어야 하는데, 몸이 피곤하여 잠을 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신 후 기도하시면서 세 명의 제자에게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잠을 잔 제자들의 약함을 너무도 잘 이해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의 어떤 약점도 갖고 계시지 않는 완벽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너를 지키시는 이”로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신”다면 우리의 안전은 얼마나 확실히 보장될까요?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는 시인의 말은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닙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로다”는 시인의 확신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답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는 시인의 불안한 삶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기도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미리 막아주시면 되지 않느냐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가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원망의 이유가 되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약자로서 보호받아야 하기에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묻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호하심은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닙니다. 은혜가 권리로 둔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축복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실제로 어려움 속에서 보호하심을 입었다면 감격해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우리의 신앙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