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사회에 미칠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장 취약한 계층부터 타격을 입을 것이란 진단에는 거의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의료, 영양, 그리고 안전에 있어서 사각 지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 시스템이 이들을 얼마나 잘 도와줄 수 있을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들이 당할 피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이들을 돕는 여러 정책이 발표되고 있고, 사회 각 기관들이 활발하게 이들을 돌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현재로는 역부족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인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좀 더 폭넓은 의미로 ‘연약한 자’를 뜻합니다.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킵니다. ‘보살피다’는 것은 ‘특별히 고려한다’는 뜻입니다. 연약한 자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품는 사람을 복이 있다고 칭찬하면서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시인은 자신있게 말합니다. 이것은 연약한 자를 돌보는 신앙인들을 격려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이런 선행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하면 복받는다는 통상적인 덕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돌보자는 그릇된 의도를 부추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이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이에게 하나님은 어느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는지를 시인은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신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사람일지라도 병상에 누울 수가 있습니다. 남을 돕던 사람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일 수가 있습니다. 보살핌을 받았던 사람이 은혜를 되갚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붙드시고 고쳐주실 것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시인이 “여호와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간구하듯이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하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려고 하지만 때론 신뢰하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는 경험을 시인이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경험이 우리를 더욱 연약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연약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살핌이 우리로 가난한 사람을 더 많이 품을 수 있도록 만듭니다. 연약한 자로서 연약한 자를 돌볼 수 있는 기적은 우리의 삶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