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유 자체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책임지는 위치에서 여행을 계획한다면 마음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목적지를 정해놓고 어떻게 그 곳에 도달할지, 그 곳에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그 날이 다가오기를 손꼽아 고대하면서 매일을 설렘 속에서 보낼 것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지루할 틈도 없이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물론 어떤 기다림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은 희미하게나마 살아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에서 주목할 단어는 ‘바라봄’입니다. 이것은 기다림을 뜻합니다. 시인은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고 합니다. 이 고백에는 시인의 신뢰가 잔뜩 묻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친숙함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끈질김이 느껴집니다. 다른 것에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한 방향만을 바라보는 순수함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빛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지를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유는 ‘은혜’를 받기 위함입니다. 은혜가 필요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가 처한 현실이 너무도 절박합니다. 그는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와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를 연속으로 토로합니다. 그의 삶에 드리워진 어둠이 얼마나 진하고 무서운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멸시와 조소를 오랜 시간동안 받지 않는다해도 잠깐의 멸시만 당해도 우리는 심한 모욕감을 느낍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이유도 없이 멸시가득한 말을 쏟아낼 때 우리는 당황하기도 하지만 매우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막강한 힘을 가진 자가 옆에서 지속적으로 멸시와 조롱을 한다면 견디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시인은 비유적으로 그의 심정을 드러냅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상전의 손에 운명이 달려 있는 종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운명을 맡기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그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면서 그 무엇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을 수 없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나요? 우리는 시인의 심정에 어느 정도로 공감하고 있나요?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을 인정하면서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지 점검할 때입니다. 멸시와 조롱 속에서도 하나님만이 은혜를 주실 수 있음을 믿고 바라봐야 합니다. 불안과 초조, 염려와 근심 속에서도 하나님만이 이것들을 뚫고 따스한 손길을 내미실 것을 고대하면서 바라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