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맛이 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맛이 있다고 평가를 해도 먹는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상태에 따라 맛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나쁘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먹는 사람이 소화불량에 걸려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도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혀의 미각을 잃은 사람이 최고의 음식을 먹는다면 어떨까요? 전혀 그 맛을 모를 것입니다. 어찌 음식뿐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감탄하는 위대한 그림을 과연 맹인이 본다면 그 느낌을 알 수가 있을까요? 맹인에게는 세상 최고의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시편119편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 시인에게 얼마나 귀한지를 맛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주의 말씀이란 고백입니다. 꿀보다 더 달다는 시적 표현도 말씀에 대한 이 시인의 반응이 얼마나 좋은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씀과 꿀을 비교하면서 말씀이 더 달다고 말하는 시인의 평가를 어떻게 공유할 수가 있을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이 시인에게는 그렇게도 달고 맛있는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무색, 무미한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에서 이 시인처럼 주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는 경험을 얼마나 해 보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주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의 말씀이 왜 이렇게 무색, 무미한지를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지배 하에서 고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천국 같던 삶이 그의 죽음 이후 지옥의 삶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모든 환경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셔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결과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힘든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더욱 가혹한 학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모세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스라엘에 전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출애굽기6장9절입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의 상함과 현실의 힘든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무색, 무미해진 것입니다. 꿀보다 더 달다는 고백은 지금 이스라엘에게는 단 1%의 가망성도 없습니다. 이렇듯이 신앙인들이 주의 말씀을 귀찮아 하고 배척하고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의 상함과 고되게 사는 삶입니다.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얼마든지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핵심은 주의 말씀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시험입니다. 주의 말씀이 어떻게 내 귀에 들리느냐를 점검해야 합니다. 꿀보다 더 달고 맛있게 들립니까? 아니면 무색, 무미하게 들립니까?